틈틈이 시간나는대로 윤관의 9성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하나 있다.

윤관의 여진정벌 때 종사한 병마령할 임언이란 사람이 당시에 남긴 기록이 있는데(이걸 영주청벽기 또는 9성기라 한다), 여기에는 당시 개척한 영토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고려사 윤관전에 인용되어 있는데, 曰이라 했으니 직접 인용일 것이고, 그렇다면 윤관의 9성에 대한 유일한 당대 기록이라 할 수 있으니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기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걸 보면,

영주청벽기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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瓘又使林彦記其事, 書于英州廳壁曰,
윤관이 또 임언을 시켜 그 일을 기록케하니, 영주청벽의 글에 이르길,

孟子曰, ‘弱固不可以敵强, 小固不可以敵大.’ 吾諷斯言久矣而今信之矣.
맹자 왈, '약함은 강함에 필적할 수 없으며, 작음은 큰 것에 필적할 수 없다' 하였는데, 나는 이 말을 오랫동안 외우고 있었지만, 이제서야 믿게 되었다.

女眞之於國家强弱衆寡, 其勢縣殊而窺?邊鄙. 於肅宗十年, 乘隙構亂, 多殺我士民, 其繫?爲奴隸者亦多矣. 肅宗赫, 然整旅, 將欲仗大義以討之, 惜乎厥功未集, 永遺弓劒. 今上嗣位, 亮陰三載, 甫畢祥?, 謂左右曰:
여진은 국가의 강약과 중과에 있어 그 세가 매우 다른데도 변방을 엿보아 넘겨보았다. 숙종 10년에 틈을 타서 난을 일으켜 우리의 사민을 많이 죽여 검은 새끼줄에 매달아 종으로 만드니, 또한 많았다. 숙종께서 격노하여 군사를 정돈하고, 대의에 기대어 토벌하려 하셨으나, 아깝게도 그 공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활과 칼을 길이 남기고 마셨다.(죽었다) 금상께서 재위를 이어 3년상을 치루시고 비로소 제사를 마친 뒤 좌우에 일러 말슴하셨다.

"女眞本勾高麗之部落, 聚居于盖馬山東, 世脩貢職, 被我祖宗恩澤深矣, 一日背畔無道, 先考深憤焉. 嘗聞古人之稱大孝者, 善繼其志耳, 朕今幸終達制, 肇覽國事, ?擧義旗伐無道一?先君之恥."
"여진은 본래 고구려의 부락으로, 개마산 동쪽에 모여 살며 대대로 조공의 직분을 닦아 우리 조종의 은택을 입음이 깊었는데, 어느날 무도하게 배반하여 선고께서 이에 매우 분노하였다. 일찍이 듣건데 옛 사람이 일컫는 큰 효라는 것은 그 뜻을 잘 이음이라 하는데, 짐이 다행히 맡은 바를 끝내고 국사를 보게되니, 어찌 의기를 일으켜 무도함을 정벌하여 선군의 치욕을 한번 씻지 아니 하겠는가."

乃命守司徒中書侍郞平章事尹瓘爲行營大元帥, 知樞密院事翰林學士承旨吳延寵爲副元帥, 率精兵三十萬?專征討.
이에 수사도 중서시랑평장사 윤관에게 명하시어 행영대원수로 삼으시고, 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으셔서, 정병 30만을 거느리고 정벌에 힘쏟도록 하셨다.

尹公事業傑然嘗慕庾信氏之爲人曰: ‘庾信六月?河以渡三軍, 此無他, 至誠而已, 予亦何人哉.’ 其至誠所感, 靈異之跡屢聞焉. 吳公時之重望, 天性愼謹, 臨事必三思, 其良圖大策施無不中.
윤공(윤관)은 준걸을 업으로 섬겨 일찍이 김유신을 사모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길 "유신이 6월에 강을 얼려 삼군이 건넜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지성일 따름인데, 나는 또한 어떤 사람인가" 하니, 그 지성에 감동하여, 영이(靈異)의 자취가 여러번 알려졌다. 오공(오연총)은 현재 중망(重望)하여, 천성이 신근(愼謹)하고, 일에 임함에 있어 반드세 세 번 생각하니, 그 양도(良圖)와 대책을 행하면 적중하지 않음이 없었다.

兩公嘗有志於此, 聞命憤激擁兵東下, 出師之日躬?甲?, 未及誓衆, ?淚交?, 莫不用命, ?入賊境, 三軍奮呼, 一以當百, ?枯破竹何足喩其易哉!
양 공이 일찍이 이에 뜻이 있어, 명을 듣고 분격하여 군사를 끼고 동쪽으로 가서, 출사일에 몸소 갑주를 입고 무리에게 고하기도 전에 눈물이 흘러 턱에 맺히니, 명령을 받들지 않음이 없었고, 적경에 들어감에 이르러 삼군이 분호하여 한 명이 백명을 당적하니, 마른 나무를 꺾고 대나무를 쪼갬을 어찌 그 쉬움에 족히 비교할 수 있겠는가.

斬首六千餘級, 載其弓矢來, 降於陣前者五十千餘口, 其望塵喪魄奔走窮北不可勝數. 嗚呼, 女眞之頑愚不量其强弱衆寡之勢而自取於滅亡, 如是.
6000여명을 참수하고 그 활과 화살을 싣고 돌아오니, 진 앞에서 항복하는 자가 50000여구였으며, 먼지를 바라보고 혼을 잃어 도망쳐 달아남이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오호라, 여진의 완고하고 어리석음이 그 강약과 중과의 세를 헤아리지 못하여 스스로 멸망을 취하게 되니, 이와 같다.

其地方三百里, 東至于大海, 西北介于盖馬山, 南接于長定二州, 山川之秀麗, 土地之膏?, 可以居吾民,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尙有存焉. 夫勾高麗失之於前, 今上得之於後, 豈非天歟.
그 지방은 300리인데, 동쪽은 대해에 이르고, 서북은 개마산에 끼였으며, 남쪽은 장주·정주 2주에 접하고,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비옥하여 가히 우리 백성이 살 수 있으니, 본래 고구려의 소유여서, 그 옛 비석이 아직 있다. 대저 고구려가 전에 잃었던 것을 금상께서 후에 얻었으니, 어찌 천운이 아니겠는가.

於是新置六城, 一曰鎭東軍咸州大都督府, 兵民一千九百四十八丁戶, 二曰安嶺軍英州防禦使, 兵民一千二百三十八丁戶, 三曰寧海軍雄州防禦使, 兵民一千四百三十六丁戶, 四曰吉州防禦使, 兵民六百八十丁戶, 五曰福州防禦使, 兵民六百三十二丁戶, 六曰公?鎭防禦使, 兵民五百三十二丁戶. 選其顯達而有賢材, 能堪其任者鎭撫之, 詩所謂, ‘于蕃于宣以蕃王室’者也, 有以見晏然高枕無東顧之憂矣.
이에 6성을 새로 세우니, 첫째는 진동군 함주 대도독부요, 병민이 1948정호이고, 둘째는 안령군 영주 방어사니, 병민이 1238정호이고, 셋째는 영해군 웅주 방어사니, 병민이 1436정호이고, 넷째는 길주 방어사니, 병민이 680정호이고, 다섯째는 복주 방어사니, 병민이 632정호이고, 여섯째는 공험진 방어사니, 병민이 532정호이다. 그 현달(顯達)을 가려 뽑고 현재(賢材)가 있어 능히 그 책임자에게 맡겨 이를 진무하니, 시경에 이르는 ‘불어나고 베풀어서 왕실이 번성한다'는 것이니, 편히 베개를 높여 동쪽으로 돌아볼 근심이 없음을 볼 수 있다.

元帥告予曰.
원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昔唐相裴晉公出征淮西及其平, 幕客韓愈爲之碑以廣其事, 故後之人知憲宗英偉絶人之德而歌頌之. 子幸從事于此, 詳其本末, 曷不作記使吾聖朝無前之偉績垂于無窮乎?’
"옛 당나라의 재상인 배진공이 회서에 출정하여 그 평정함에 미쳐, 막객인 한유가 비를 세워 그 일을 넓혔으니, 고로 후세의 사람들이 헌종의 영위절인(英偉絶人)한 덕을 알아 노래를 불러 이를 기렸다. 당신이 다행히도 이에 종사하여 그 본말을 자세히 알고 있으니, 어찌 우리 성조의 전무한 위업을 무궁토록 드리워지게 기록하도록 하지 않겠는가?"

彦承命援筆誌之.
임언이 붓을 당겨 이를 기록한다.


瓘獻?三百四十六口馬九十六匹牛三百餘頭, 城宜州通泰平戎二鎭, 與咸英雄吉福州公?鎭爲北界九城, 皆徙南界民以實之.
윤관이 포로 346구와 말96필, 소 300여두를 바치고, 의주와 통태·평융 두 진의 성을 함주·영주·웅주·길주·복주·공험진과 더불어 북계 9성으로 삼아 남계의 백성을 모두 옮겨 이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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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地方三百里, 東至于大海, 西北介于盖馬山, 南接于長定二州.
그 지방은 300리인데, 동쪽은 대해에 이르고, 서북은 개마산에 끼였으며, 남쪽은 장주·정주 2주에 접한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데, 300리는 약 120Km니, 이를 바탕으로 최대한 넓게 잡아서 지도에다 표시해보면 대충 이 정도가 될 것이다. (고려사 열전에는 예종이 내린 교서에 '윤관이 100리를 개척했다'고 나오고, 또한 청벽기가 30만군이라 과장한 것을 볼 때 100리가 더 정확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여기선 300리를 기준으로 색칠함)


참고로 개마산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불분명하다 말하고 있고, 혹은 백두산이라는 말도 있지만(동사강목 개마대산고 등), 고려 현종 21년(1020) 때 바쳐졌다는 당대의 기록인 삼한회토기를 인용하고 있는 반계수록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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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韓會土記, 本國山脈, 自蒙羅骨嶺, 爲長嶺山, 爲頭里山, 爲頭白山, 爲盖馬山, 其下爲東沃沮. 又云, 蓋馬山脈, 回爲鐵嶺, 其西南脈爲劍池山, 爲松嶽云, 今咸鏡平安兩道之間, 嶺脊連亘數百里者, 卽盖馬山.
삼한회토기에는 본국 산맥이 몽라골령에서 시작하여 장령산이 되고 두리산이 되며, 두백산이 되고 개마산이 되며, 그 아래가 동옥저라 하였고, 또 개마산맥이 휘돌아 철령이 되고 그 서남 맥(脈)이 검지산이 되며, 송악이 되었다고 하니, 지금의 함경·평안 두 도 사이에, 영(嶺)의 등성마루가 수백 리 걸쳐 있는 것이 곧 개마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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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여 고려 당시의 개마산이 백두산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또한 영주청벽기에는 서북이 분명히 개마산에 끼였다고 했다). 즉 그 당시 고려의 기록을 보면 9성이나 공험진 도저히 두만강 이북으로 넘어갈 수가 없고, 윤관이 거대한 영토를 먹은게 될 수가 없다.

그런데 도대체 왜 조선 초기에 두만강 이북설이 나왔고, 지금도 이걸 바탕으로 넓은 영토를 먹었다고 주장하고 있는걸까?

참고로 이덕일씨의 경우 저 300리가 하나의 성에만 해당하는 거라고 주장하고 있었다.(혹은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인용했거나) 물론 그 근거나 이유는 나와있지 않았다. 그리고 두만강 이북에 있었다며 단언하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직 내가 모르는 것이 많아서 그럴테니, 앞으로도 틈틈이 알아봐야겠다. 아직 논문도 제대로 못봤다.